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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했다' vs '패가망신'…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갈라진 국민의힘
- 기자, 리차드 김
- 기자, BBC 코리아
- 게재 시간
- 읽는 시간: 5 분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국민의힘 내부 갈등의 새 뇌관으로 떠올랐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번 사태를 심각한 참정권 침해로 규정하고 전국 단위 재선거론까지 제기했지만, 당내에서는 전면 재선거론의 현실성을 둘러싼 신중론과 지방선거 패배에 따른 지도부 책임론이 동시에 분출하고 있다.
BBC 코리아가 국민의힘 중진 및 재선 의원들을 취재한 결과, 이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선관위에 의한 중대한 참정권 침해로 보는 데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부정선거'나 '전국 재선거'로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한 기류가 강했다.
일부 의원들은 장 대표가 재선거론을 앞세우는 방식이 지방선거 패배 책임론을 피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면 재선거는 정치적 레토릭'
국민의힘 내부와 정치권에서는 장 대표가 제기한 전국 단위 재선거론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정치적 주장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장 대표는 선관위 책임론을 앞세워 재선거 필요성을 거듭 주장하고 있지만, 당 안팎에서는 법적 근거와 절차 측면에서 이를 관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까지 국민의힘 원내운영수석부대표를 지낸 유상범 의원은 BBC와의 통화에서 장 대표가 주장해온 전국 단위 재선거론에 대해 "정치적 레토릭이라고 판단하면 될 것"이라며 "전면적 재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 우리 당 의원들도 공감한다"고 밝혔다.
계파색이 옅은 박형수 의원도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박 의원은 통화에서 "전면 재선거는 현실적으로도 어렵고 옳은 방법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박 의원은 일부 지역에 대한 선거소청 자체에는 필요성을 인정했다. 박 의원은 "참정권이 침해됐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이 있는데, 선거소청을 하지 않으면 그분들의 목소리가 선관위나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기회가 없어져 버린다"며 "그 목소리가 판단을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 정치적 의미"라고 했다.
전면 재선거론에는 선을 그으면서도, 투표권 침해를 주장하는 유권자들의 문제 제기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앞서 국민의힘은 지난 17일 의원총회 논의 끝에 서울, 경기, 인천, 부산, 울산, 광주·전남, 충북 등 7개 지역 광역단체장 선거에 대한 선거소청을 중앙당 명의로 제기했다. 장 대표는 당초 전국 16개 시도 전체에 소청을 내자는 입장이었지만, 의총을 거치며 당 차원의 대응은 7개 지역 중심으로 조정됐다.
박 의원은 의총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의결의 효력은 없지만 대략 거수를 해봤는데, 7개 지역에 대한 선거소청을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다수였다"고 전했다.
4선 중진인 한기호 의원은 선거소청 추진 과정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한 의원은 장동혁 지도부가 지난 15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일부 지역에 대한 선거소청 제기 방침을 먼저 정한 데 대해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의원들의 입장을 듣지도 않고 결정한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선거를 하려면 조건에 충족되느냐가 먼저인데, 그 기준이 불분명하다"며 "분명한 결격 사유에 의해 법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어서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선관위가 초래한 참정권 침해'
국민의힘 의원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를 부정선거로 단정하는 데에는 선을 긋는 발언도 나왔다.
4선 중진인 김태호 의원은 BBC와의 통화에서 "부정행위다 이렇게는 보고 싶지 않다"며 "선관위의 무능이 불러온 아주 심각한 참정권 침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선관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전문가 그룹을 통해 국민 신뢰를 받을 만한 프레임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선관위 책임론은 강하게 제기하되, 논란을 부정선거 프레임으로 끌고 가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유상범 의원은 젊은 층의 선거 불신을 단순한 음모론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2030 세대는 지금까지 부정선거에 대해 소문에 가까운 부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이번에는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중단되고 투표를 못한 유권자가 다시 나오는 상황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개표 입력값이 오입력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높아진 것"이라며 "이번 선거를 믿을 수 있느냐는 생각이 광장에서 '부정선거'라는 용어로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대응 수위를 둘러싼 고민도 이어지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선관위 관리 부실을 강하게 문제 삼지 않을 경우 지지층과 거리 시위에 나선 청년층의 불만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전면 재선거론을 계속 앞세울 경우 민주당이 제기하는 선거 불복 프레임에 갇힐 위험이 커질 수 있어서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선거소청을 사실상 선거 불복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진상 규명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국민의힘이 이를 재선거 요구로 확대하는 것은 정치 공세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재선거론보다 국정조사, 특검, 선관위 제도 개혁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현실론이 나오는 이유다.
장 대표는 18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재선거 문제를 선거소청과 재판에만 맡길 수 없다며 특별법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히 장 대표는 중앙선관위 책임자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주장하며 국민의힘 추천 특검 수용을 요구했고, 올림픽공원 시위 현장에 모인 청년과 시민들이 요구하는 투표함 수개표 공개 검증 문제도 정치가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장동혁 사퇴론'에 갈라진 국민의힘
재선거론의 수위 조절 문제는 장 대표의 거취 논란과도 맞물려 있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장 대표 사퇴론이 꾸준히 제기돼 왔고, 17일 의원총회에서는 이 갈등이 공개적으로 분출됐다.
일부 의원들은 장 대표 면전에서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했고, 당권파 의원들은 지금은 선관위 책임 규명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맞섰다. 선관위 책임론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지와 장동혁 체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같은 자리에서 충돌한 것이다.
아직까지 지도부 사퇴론이 대세는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유상범 의원은 장 대표 사퇴 요구 목소리에 대해 당내 절대 다수 의견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유 의원은 "친한(친한동훈)계 의원들과 '대안과미래' 소속 의원들이 지속적으로 장동혁 대표의 역량 문제와 정치적 입장 문제를 가지고 사퇴 주장을 해왔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비록 국민의힘이 12대 4로 광역단체장에서 패했다고 하지만, 과거 2018년 탄핵 후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와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한 성과를 거뒀다"며 "졌지만 상당 부분 선전했다"고 평가했다.
유상범 의원은 특히 "이번에 강원도지사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졌지만, 2018년 11석에 그쳤던 강원도의원 선거에서 이번에는 54명 중 30명이 당선돼 다수당이 됐다"며 "어려운 상황에서 상당히 선전했다는 분위기도 있어, 장동혁 대표가 당장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다수 의견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기호 의원은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이긴 것은 오세훈 후보의 개인 능력으로 이긴 것"이라며 "오세훈 시장이 이긴 것에 대한 당의 기여도가 없음에도 마치 지도부가 기여한 것처럼 얘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김태호 의원은 "지방선거를 통해 민심이 뚜렷하게 확인됐다"며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의 뜻에 반응해야 하고, 그 반응은 곧 책임"이라고 했다. 장 대표를 향해 즉각적인 사퇴를 촉구한 셈이다.
김 의원은 특히 "패배했는데 그걸 승리로 해석하는 게 가장 큰 위기"라며 "개인이라면 패가망신할 것이고, 집단이라면 국민으로부터 폐기 처분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장 대표의 거취에 대해 "사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결국 시간 문제"라고 예상했다.
김 의원은 장 대표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잠실 개표소 시위 현장에 적극 대응하는 데 대해서도 "시민과 젊은 친구들의 참정권 침해라는 중대한 사건에 당연히 반응해야 하지만, 그것이 장 대표의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며 "이미 신뢰를 잃었다는 뜻이고, 리더십이 붕괴됐다고 보는 것"이라고 했다.
당 안팎에서는 '장 대표가 재선거론으로 사퇴론을 막으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형수 의원은 "그런 지적이 나오는 건 사실이고, 그렇게 비춰지는 것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박 의원은 당내 사퇴론의 표출 방식이 복잡한 심리를 낳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친한계 의원들이 한쪽에서 계속 목소리를 내다보니 사퇴를 말하면 그 계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모양이 될 수 있어 부담을 느끼는 의원들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친한계와 '대안과미래'가 장 대표 사퇴론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계파적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해 공개 발언을 자제하는 의원들도 있다는 의미다.
정치권에서는 장 대표가 당장 물러나지는 않더라도, 거세지는 사퇴 요구를 계속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고위원들의 줄사퇴가 없는 한 대표 사퇴를 강제할 뚜렷한 절차는 없지만, 지방선거 패배 책임론이 당내 갈등의 한 축으로 부상하면서 장 대표의 리더십 부담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일에는 경기도에 지역구를 둔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 대표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추진했다가 막판 내부 이견으로 보류했다. 안철수·김은혜 의원 등이 회견문 방향과 문구를 두고 이견을 보이면서 회견은 일단 연기됐다. 수도권 의원들 사이에서도 장 대표 체제에 대한 이견이 적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같은 날 장 대표는 과로 증상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의료진 권고로 입원 치료에 들어갔다. 국민의힘은 장 대표 부재 중에도 당무를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당무 복귀 시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장 대표 입원으로 당내 사퇴론은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간 모양새지만, 퇴원 이후 재선거론의 향배와 지도부 책임론을 둘러싼 갈등은 다시 불거질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