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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030은 왜 '투표용지 사태'에 분노하는가
- 기자, 김효정
- 기자, BBC 코리아
- 게재 시간
- 읽는 시간: 4 분
이번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싼 문제 제기에는 유독 2030세대가 앞장서고 있다.
지난 6일부터 이어지고 있는 집회와 시위 현장에는 청년층이 주축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전국 대학가에서도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내일 시험인데도 왔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이어진 집회 현장에는 대학생과 직장인 등 젊은 참가자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경남 진주에서 친구들과 함께 4시간을 달려왔다는 이상우(가명) 씨는 "학생들이 투표를 해야 하는데도 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며 "이런 일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면 민주주의가 결국 후퇴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기 일산에서 혼자 집회에 참여했다는 또 다른 대학생 김현수(가명)씨는 "투표용지가 없어 투표를 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고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침해된 참정권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두 번째 집회에 참석했다는 한 30대 참가자는 "참정권이 박탈됐다는 것은 큰일인데 이 나라에서는 별로 큰일이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것 같아 나왔다"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현장에 와 보니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18개 대학 총학생회 공동 시국선언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전국 주요 18개 대학 총학생회는 10일 각 대학 캠퍼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국선언을 열고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혁을 촉구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 학생회관 앞에도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국가에 의한 참정권 침해를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도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다.
황인서 연세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장은 BBC 코리아에 "대의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인 참정권이 국가에 의해 훼손되는 사태가 있었던 만큼 많은 학우들이 분노하고 있었다"며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국선언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20대가 이번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로 '공정성'을 꼽았다.
"최근 한국의 20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 중 하나는 공정함입니다. 일상생활에서의 공정함뿐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공정함인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노가 나온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4학번 김민수 씨는 "이한열 열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며 지켜온 민주주의가 행정기관의 무능으로 훼손됐다는 점에서 분노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성세대는 실제로 민주주의가 억압됐던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 일을 행정상의 미비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며 "반면 우리 세대는 민주주의 운동을 역사책으로 배워왔고, 계엄 사태를 통해 처음 민주주의 훼손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주의가 더 발전해야 하는 시점에 또다시 절차적 문제가 발생한 만큼 젊은 세대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신들이 단순한 정치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고 말한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생 30대 한연우(가명) 씨는 "지방선거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 선거인데도 이번에는 투표율이 높았다"며 "그만큼 2030이 스스로를 참여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지난해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을 거치며 청년층이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다.
"예전에는 시위라고 하면 특정 단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엄 사태를 거치며 교과서에서만 보던 민주주의 훼손을 직접 보게 됐습니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도 경험했고요. 그러다 보니 이번 사태에도 더 빠르게 반응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보수 성향 학생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진보 성향 학생들, 평소 정치에 무관심했던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었다"며 "오히려 다양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영보다 절차
다만 청년층의 문제의식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20대 졸업생 이세나(가명) 씨는 "2030 중에도 참여 이유와 정치적 입장은 다양하다"며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선관위의 부실 대응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잠실 올림픽공원 집회 대신 이날 시국선언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아 잠실 집회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참가자들의 목표와 의견이 너무 다양해지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됐습니다. 오늘 시국선언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 자체를 민주주의 훼손의 문제로 보고 선관위를 규탄하자는 취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씨는 정치권을 향해서도 "이 사안을 또 하나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치인도 정치권도 이번 문제를 또 하나의 정쟁거리로 소비하기보다 시민들이 실제로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올림픽공원 집회에도 참석했다는 연세대 통합과정 김정민 씨(26) 역시 이번 사태가 진영 논리로 소비되는 데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SNS에서는 자꾸 좌우 진영 논리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지만, 이 문제는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 침해 문제"라며 "정당과 이념이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건 잘못된 일'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정선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부정하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했다는 뜻인데, 그 단어 자체를 특정 정치 진영의 언어로만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할 수 있지만 투표를 하는 과정 자체는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며 "절차가 공정해야 결과에도 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며 성장한 세대'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배경에 청년 세대 특유의 민감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고운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2030세대가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단순히 선거 행정 오류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공정한 절차만이 우리를 보호한다'는 세대적 신념이 침해받았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쟁적인 취업, 입시 환경 속에서 자란 세대에게 '동일한 기준, 동일한 절차'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이번 사태는 이들이 절차적 공정성과 정당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30세대가 민주주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며 성장한 세대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지금의 2030은 민주화 이후 태어난 세대이고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며 "권위주의 사회를 경험한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참정권이 침해됐다고 느낄 경우 더 크게 반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기존의 '이대남 보수화'가 약간의 연관성은 있어도 이것을 단순히 2030 남성들만의 문제로 볼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는 "20대 여성들도 많이 참여했고, 30대 여성들 가운데서도 보수 성향의 표가 많이 나왔다"며 "청년 세대 전반의 문제의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지금까지는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정치 참여나 관심도가 많이 올라오고 있다"며 "참정권 문제를 계기로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는 만큼 청년 정치나 청년 대표성 측면에서도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움직임을 특정 정치 성향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인 고려대 세종캠퍼스 공공사회학과 교수는 "출발점은 세대적 문제 인식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참가자들은 특정 정치세력의 주장을 답습하기보다 참정권 침해와 공정성 훼손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집결했다"며 "좌우의 언어가 아니라 절차와 권리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특정 정파의 발현으로 환원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또 "청년들의 정당한 절차적 요구가 그 서사에 흡수되는 것은 시위의 정당성 자체를 훼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추가보도: 최유진, 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