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별세...영국을 넘어 사랑받은 위대한 혁신가

    • 기자, 샘 우드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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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였으며, 짙은 요크셔 억양으로 자신의 날카로운 견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했다.

호크니 사실상 모든 예술 매체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회화와 사진, 아이패드를 활용해 작업했으며, 에칭과 석판화는 물론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까지 제작했다. 또한 웅장한 오페라 무대 디자인부터 익숙한 펜과 잉크를 통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에서도 능숙하게 활동했다.

요크셔주 브래드퍼드 출신으로, 과산화수소로 탈색한 금발에 둥근 안경과 납작한 치즈 커터 모자를 즐겨 쓰던 호크니는 1960년대 미술계를 뒤흔들었고, 반세기가 넘은 뒤에도 전시회마다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2018년 그의 수영장 연작 중 한 작품이 경매에서 약 7000만파운드(1426억원)에 낙찰되며 당시 생존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호크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오히려 놀라워했다.

그는 그저 한 가지 규칙을 따랐을 뿐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그려라."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7년 7월 9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케네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사회적 불의와 핵무기, 흡연을 똑같이 혐오했다. 어머니 로라는 가족의 버팀목 같은 존재였으며, 의지가 강하고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데이비드는 다섯 자녀 중 한 명으로, 브래드퍼드의 작은 연립주택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단란하고 사랑 넘치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공습이 벌어질 때면 성경책을 꼭 끌어안은 채 계단 밑에 숨어 지냈다. 1940년에는 폭탄 한 발이 떨어져 거리 전체가 초토화되기도 했다.

그는 한결같이 그림에만 몰두했다. 전쟁 중에 종이가 부족해 어린 시절에는 부엌 바닥이나 교회 찬송가 책에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후 장학생으로 브래드퍼드 그래머 스쿨에 다니게 된 그는 미술 외의 과목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호크니는 한 시험 답안지에 "저는 과학은 못하지만 그림은 그릴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인기가 많고 유머러스했지만, 교사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당시 한 교사는 평가서에 "미술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적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완전히 빗나간 평가였다.

16세가 되자 그는 미술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줄무늬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학교에 나타났다.

호크니의 차림새는 화려했을지 몰라도 그의 직업 윤리는 금욕적이었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이젤 앞에 서서 맹렬히 작업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시체 안치소에서 시신을 씻는 일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후 런던 왕립예술대학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호크니는 난방도 안 되는 정원 창고에서 생활하며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그림에 쏟아부었고, 새로 찾은 보헤미안 생활을 만끽했다.

1960년대 미술계는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돼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동급생이었던 미국 화가 R.B. 키타이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호크니는 훗날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호크니가 관심을 가졌던 건 정치와 문학,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 작품에서는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과 사랑을 나누는 자기 모습을 그렸다.

그 그림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예술가의 관심사와 성적 환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호크니가 자신이 되고자 열망하는 존재를 향해 손을 뻗는 과정이었다.

호크니는 대학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고집이 셌다. 그는 졸업을 위해 반드시 제출해야 했던 단 한 편의 에세이조차 쓰지 않았고, 결국 기말고사에 낙제했다.

이 결정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왕립예술대학은 입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그에게 학위를 수여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영예인 골드메달까지 수여했다. 호크니는 전통적인 학위복 안에 금색 라메 재킷을 입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고급 주간지를 잇달아 창간하며 팝스타와 예술가들을 계급 경계를 초월한 새로운 유형의 유명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선데이 타임스'는 호크니가 앤디 워홀과 어울리는 모습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명성을 얻은 뒤에도 호크니는 전후 영국의 음울함을 뒤로한 채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 나섰다.

1964년 그는 미국 남성 잡지에서 봐온 완벽한 빛과 햇볕에 그을린 남성의 육체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비행기가 착륙할 무렵, 그는 아래로 보이는 계곡 곳곳에서 반짝이는 수백 개의 수영장을 마주했다. 마치 풍요와 여유, 그리고 성적 자유가 있는 근심 없는 삶을 약속하는 듯했다.

당시 영국은 겨우 배급제를 폐지한 상황이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수영장은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호크니는 완전히 매료됐다. 그는 영국식 유화 물감을 버리고 밝은 캘리포니아식 아크릴 물감을 선택했지만, 브래드퍼드 억양만큼은 그대로 유지했다. 미국인들은 그 억양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생애 처음이자 아마도 유일하게 성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시기를 보냈으며, TV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머리를 새하얗게 탈색했다.

호크니는 주변에서 본 건물들을 그렸다. 피라네시가 로마를 위해 했던 일을, 로스앤젤레스를 위해 해내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그리고 눈부신 날씨와 벌거벗은 남성들의 육체가 어우러진 수영장은 호크니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주제가 됐다.

마침내 자신의 낙원을 찾은 것이다.

"데이비드는 다가올 황금기에 대해 얘기한다." 세실 비튼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컴퓨터가 노동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더없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은 호크니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호크니는 각진 건물들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롤러로 그렸다. 그런 다음 붓으로 보이지 않는 다이버가 일으킨 물결의 순간적인 파동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담아낸다. 카메라였다면 그 순간을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았겠지만, 호크니는 그 움직임이 계속 흐르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동성애가 여전히 불법이었던 당시, 이 그림들은 하나의 삶의 방식을 옹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4년 후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세관원들은 호크니의 잡지들을 압수했다. 잡지에는 나체로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성들이 실려 있었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아니었다. 그러나 관료들은 이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호크니는 격분했다. 그는 움츠러든 세관 직원을 향해 "나는 영세 사업가처럼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며 "법정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검열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요란스럽게 벌였고, 결국 당시 내무장관 제임스 캘러헌이 개입해 압수한 잡지들을 돌려줬다.

그의 작업량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는 노팅힐 자택의 침대 발치에 "일어나서 당장 작업 시작하라"는 메모를 붙여뒀다.

그림을 그리다가 지치면 사진을 찍거나 에칭을 하거나 오페라 무대를 디자인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또한 그는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있었다.

호크니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캘리포니아 출신 청년, 피터 슐레싱거와의 관계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호크니는 자신의 작업 세계를 다루는 TV 다큐멘터리 출연에 응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프로그램이 자신의 연애 생활과 그로 인한 상처에 초점을 맞추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시 이주했다. 이번 목적지는 파리였다. 둥근 안경과 화려한 럭비 셔츠, 멜빵바지 차림의 호크니는 그곳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짙은 요크셔 억양이 밴 서툰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초상화 작업에 열중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친구와 가족을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여기서도 그의 예술은 온통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비용은 들었지만, 그가 평생 믿어온 신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이중 초상화(double portrait)였다.

관람객은 그림 속 인물들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호크니는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훨씬 더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그린 부모님 초상화는 그런 조용한 드라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 속 케네스와 로라는 서로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48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온 부부이지만, 함께 있으면서도 어딘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

호크니만큼 기술에 열광한 예술가는 드물었다.

1970년대, 그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매료돼 공간과 원근감을 활용한 수백 점의 콜라주를 제작했다.

나중에는 복사기와 팩스 기기로 만든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한 장 한 장의 종이를 정교하게 조합해 거대한 이미지를 완성해냈다.

1970년대가 끝나갈 무렵, 데이비드 호크니는 세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예술가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점점 심각한 수준으로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선명한 분홍색 보청기를 착용해야 했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은 상태였다. 브래드퍼드에서 온 소년은 이제 카리브해 휴양지 무스티크에서 마거릿 공주와 어울리는 인물이 돼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한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1980년대 에이즈가 유행하면서 호크니는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한 차례 뉴욕 방문에서는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세 곳의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

그는 작업에 더욱 몰두하며 친구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냈다.

그들이 누렸던 자유롭고 걱정 없던 삶은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림은 호크니가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두는 방식이었다.

한편 그는 점차 오랜 뱃사람 같은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호크니는 미국 사회를 옥죄는 엄격한 규제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다.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어려워진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담배를 80개비나 피웠어요." 그는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담배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에 대해 별다른 호감을 갖지 않았다. '대처주의'가 사업가에게는 자유를 줬지만, 예술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처 정부가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이라고 비판했으며, 동성애 조장을 금지한 '제28조(Clause 28)'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니 블레어 총리를 더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호크니는 "신노동당(New Labour)의 문화적 독선"을 혐오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특히 노동당 소속 정치인인 고든 브라운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브라운을 "지루한 칼뱅주의적 위선자"라고 비난하며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면 "걷어차 버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그가 1990년대에 이룬 업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런던 예술계는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그리고 '젊은 영국 예술가들(Young British Artists)'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근 상어를 전시하거나 정리되지 않은 침대를 작품으로 내놓는 등 도발적인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위대한 혁신가였던 호크니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그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그림이 아니었다. 호크니는 풍경화에 새로운 열정을 쏟았다. 주말마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이었다.

그는 누이와 연로한 어머니가 살고 있던 브리들링턴으로 이주한 뒤, 요크셔 월즈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10대 시절 호크니는 용돈을 벌기 위해 매년 여름 브래드퍼드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지역 농장에서 일하곤 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은 수확철 일을 돕고 친구들과 헛간에서 잠을 자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호크니에게 이곳은 1960년대 캘리포니아만큼이나 낙원 같은 장소였다.

그는 날씨가 어떻든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울창한 초원과 길가의 풀밭을 그린 작품 수백 점을 남겼고, 그 규모는 종종 엄청나게 컸다.

이는 젊음과 냉소, 개념성을 중시하던 당시 미술계에 던지는 한 연로 화가의 도전장이었다.

물론 모두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미술평론가 브라이언 시웰은 이 작품들이 "공원의 철책"에나 걸어둘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 거대한 크기로 오히려 친근한 느낌을 주며 관람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2013년 그의 조수가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요크셔에서의 삶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23세였던 도미닉 엘리엇은 브리들링턴에 있는 호크니의 자택에서 가정용 세정제를 마신 뒤 숨졌다. 법원에서는 엘리엇이 코카인과 엑스터시를 복용한 뒤 세정제를 마셨다는 내용이 공개됐다.

검시관은 그가 당시 48세였던 호크니의 파트너 존 피츠허버트와 함께 "파티를 즐긴" 뒤 해당 액체를 마신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불의의 사고"로 결론내렸다.

조사 결과, 당시 호크니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전해졌다.

검시관은 사망에 의심스러운 정황이나 "제삼자"의 개입은 없었다고 밝혔다. 2013년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호크니가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공식적인 답변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호크니는 80대 후반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으며,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새로운 거처인 노르망디의 풍경을 담은 연작을 완성했다.

2023년 런던에서는 그가 직접 내레이션을 맡은 4D 몰입형 전시가 열렸다. 거대한 지하 공간의 11미터 높이 벽면에 그림, 사진, 오페라 무대 디자인이 투사됐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거대한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들을 아이패드로 그리거나 해리 스타일스의 친밀한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똑같이 즐겼다.

2025년에는 파리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당시 호크니는 24시간 의료 지원을 받는 상태였으며, 여행길에는 닥스훈트 반려견과 두 명의 의료 보조 인력이 늘 동행했다. 그리고 이들 역시 그의 작품 속에 영원히 남게 됐다.

2027년 그가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9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테이트 브리튼에서의 대규모 전시와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의 멀티미디어 설치작품 전시 등이 계획되고 있다.

긴 예술 인생 동안 데이비드 호크니는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예를 누렸다. 그만큼 거절한 것도 많았다. 그는 1990년 기사 작위를 거절했고, 자신이 명예 훈장(Companion of Honour)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누군가가 그의 편지를 대신 열어 수락했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수여되는 영국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은 받아들였다. 이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내리는 개인적 영예로 여겼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헌사는 따로 있었다.

2007년,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호크니의 7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예술가가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10분 동안 화재경보기를 끄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것이 평범한 '호크니 씨'가 진심으로 감사해했던 종류의 영예였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을 영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