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약물들

우울증, 불안장애,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다양한 정신건강 약물은 열에 더욱 취약해지게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BBC/ Serenity Strull

사진 설명, 우울증, 불안장애,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다양한 정신건강 약물은 열에 더욱 취약해지게 할 수 있다
    • 기자, 나오미 미하라
    • 기자, BBC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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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고혈압 치료제 등 널리 처방되는 약물이 탈수 및 기타 온열 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도 있다.

지난 6월 올해 유럽을 강타한 폭염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레아나 오쿠무스는 자신이 왜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더 힘들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파트 문을 나서자마자 얼굴이 땀으로 흥건해졌다"고 말했다. 에어컨이 없는 브뤼셀의 아파트 최상층에 사는 28세의 오쿠무스는 사무실이나 동네 카페처럼 냉방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체온이 내려갈 때까지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특히 아파트 실내 온도가 섭씨 34도까지 치솟았던 날에는 잠을 18시간 정도나 잤던 것 같아요." 당시 그는 잠에서 깨는 것도 쉽지 않았고, 혈압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여름을 겪어본 오쿠무스에게 이번 폭염의 강도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고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본 뒤에야 2년 전부터 우울증과 불안 증세로 복용해 온 약물이 폭염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폭염은 더욱 강력하고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의사들과 보건기관들은 정신과 약물과 고혈압·심장질환 치료제 등 흔히 처방되는 일부 약물이 인체의 체온 조절 능력에 문제를 일으켜 온열 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신 건강 약물이 폭염에 미치는 영향

우울증, 불안장애,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다양한 정신건강 약물은 뇌에서 체온을 조절하는 중추인 시상하부에 영향을 미쳐 인체가 열에 더욱 취약해지게 할 수 있다.

뉴햄프셔의 퇴직 정신과 의사이자 '기후와 건강을 위한 의학협회 컨소시엄' 운영위원인 로버트 페더 박사는 "더울 때 시상하부는 활동량을 줄이고 땀 배출을 늘리며 신진대사를 낮추도록 유도한다"며 "이러한 반응은 모두 우리 몸이 열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흔하게 처방되는 항우울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와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SNRI)도 시상하부에 영향을 주는 약물에 포함된다. 이에 속하는 약물로는 설트랄린, 플루옥세틴, 에스시탈로프람, 벤라팍신 등이 있다. 이 약물들은 기분과 기타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천연 화학물질인 세로토닌의 뇌 내 재흡수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시상하부에 세로토닌이 과도하게 쌓이면 체온 조절 능력이 저하되고 땀이 과도하게 배출될 수 있다. 항우울제 복용자 5명 중 1명꼴로 이 증상을 겪는데, 과도한 땀 배출은 탈수 및 전해질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페더 박사는 "고온으로 이미 탈수 증상이 나타난 상태라면 이러한 현상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말했다.

구세대 항우울제인 삼환계 항우울제(TCA) 역시 다한증을 유발하거나, 반대로 땀 배출을 억제할 수 있어 문제가 된다. 땀 분출이 줄어들면 체내 열 방출이 어려워져 체온이 상승한다. 이러한 항우울제는 땀 생성 등 다양한 신체 기능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아세틸콜린의 활성을 차단하는 '항콜린 효과'를 유발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약물이 가진 가장 위험한 부작용(경우에 따라 온열 질환)에 대해 환자들의 이해가 더욱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 출처, BBC/ Serenity Strull

사진 설명, 일부 전문가들은 약물이 가진 가장 위험한 부작용(경우에 따라 온열 질환)에 대해 환자들의 이해가 더욱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커리어 코치 캐롤라인 프레시네는 항우울제, 기분 안정제, ADHD 치료제 등 세 가지 종류의 정신과 약물을 복용 중이다. 그 역시 복합적인 약물의 작용으로 이번 여름을 혹독하게 보내고 있다. 이례적으로 습하고 길었던 7월 폭염 속에서, 그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예민해지며 평소보다 땀이 많이 나는 증상을 겪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게 부실한 식단과 부족한 수분 섭취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 건강 지원 모임의 한 친구가 폭염과 약물의 상관관계를 다룬 기사들을 보여줬다. 모임 내 다른 회원들도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프레시네는 "그동안 나의 건강 상태와 약물이 가진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부작용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형의 정신과 약물도 신체의 체온 조절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조현병과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항정신병 약물은 시상하부의 도파민 작용을 차단해 체온을 낮추는 정상적인 신체 반응을 방해한다. 폭염 사례에 대한 과거 연구에 따르면 항정신병 약물 복용은 사망률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탈린과 같은 ADHD 치료용 자극제는 체열 생성을 촉진하고 혈관을 수축시켜 신체의 자연스러운 체온 조절을 방해한다. 페더 박사는 이러한 약물이 신체의 피로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어, 약물 사용자는 자신이 과열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베타차단제부터 이뇨제까지

폭염에 대한 취약성을 높이는 것은 비단 정신과 약물뿐만이 아니다. 고혈압 및 심장질환 치료제 역시 더위에 대한 민감성을 높일 수 있는 대표적인 약물이다.

고혈압 치료에 흔히 쓰이는 이뇨제, ACE(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억제제, ARB(안지오텐신 II 수용체 차단제)는 전해질 불균형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특히 뒤의 두 계열 약물은 갈증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기도 한다.

콜로라도대학교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로건 하퍼 박사는 "이러한 약물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증 탈수로 이어지면 신부전, 심근경색을 비롯한 심각한 장기 손상의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대표적인 심장질환 치료제인 베타차단제는 피부로 가는 혈류를 제한해 체내의 열이 효과적으로 방출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아울러 삼환계 항우울제뿐 아니라 파킨슨병, 과활동성 방광, 호흡기 질환, 알레르기 등 다양한 질환 치료에 쓰이는 다른 항콜린성 약물 역시 땀 배출과 체온 조절 메커니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퍼 박사는 "체온 조절 능력을 저하하는 약물과 장기 손상 위험을 높이는 약물을 동시에 복용하는 환자들이 많다"며 "특히 열 질환에 전반적으로 더 취약한 고령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더위에도 일부 약물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뇨제, 항정신병 약물, 베타차단제, 자극제, 고혈압약 등을 복용하는 미국의 고령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폭염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여름철 고령 환자의 온열 질환 관련 입원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65세 이상 고령층일수록 여러 약물을 복합적으로 처방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퍼 박사는 "단일 약물을 복용할 때보다 이러한 약물들을 조합해 복용할 때 위험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다만 정확히 어떤 약물 조합이 가장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회경제적 요인 역시 온열 질환 위험에 영향을 미친다. 하퍼 박사는 "어떤 사람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해 과도한 열기에 노출되거나 노숙 생활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며 "나무가 적고 열을 흡수하는 어두운 콘크리트 면적이 넓어 기온이 높게 유지되는 도시 열섬 지역에 살면서 에어컨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네바다주 남부 투로대학교의 응급의학과 교수인 세실리아 아하노누 박사는 최근 이러한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라스베이거스의 기온이 섭씨 43도에 달했을 당시 한 지역사회 보건 봉사활동에서 그는 공원에서 자고 있던 60대 남성을 만났다. 아하노누 박사는 "그는 안색이 창백했고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으며 심장 박동도 빨랐다"고 말했다.

이뇨제와 SSRI를 복용 중이던 이 남성은 자신의 체온이 얼마나 올라갔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하노누 박사는 "그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증상을 단순히 극심한 더위 탓으로 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추가로 질문을 이어가던 중 또 다른 원인이 드러났다. 바로 그가 복용하고 있던 약물이었다.

아하노누 박사는 그에게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낮 최고기온 시간대에는 야외 활동을 피하는 등의 기본적인 수칙을 안내한 뒤, 인근 무더위 쉼터 목록을 전달했다. 아울러 응급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열사병의 위험 징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혼란을 느끼는 경우, 혹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면 즉시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식 제고

의사들은 담당 의료진과 상담하지 않은 채 임의로 약물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퍼 박사는 의료진 사이에서도 폭염과 약물의 연관성에 대한 교육과 인식이 더욱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가 새로운 약을 처방할 때마다 가장 위험한 부작용 몇 가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온열 질환 고위험군에게 특정 약물을 처방할 때는 부작용 목록에 이러한 위험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오쿠무스에게 이번 여름의 경험은 약물 복용 자체를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는 "여름철에 이런 상태가 되면 업무는 물론 일상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의사를 찾아가 약을 완전히 끊는 방안을 진지하게 상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반면 프레시네는 약물 복용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약들은 나에게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에 다른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약물의 부작용이 올여름 자신이 겪은 증상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전했다.

프레시네는 "이번 여름 내가 겪은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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