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외교관의 "넌 '사생활 침해'를 했고 난 '뺑소니'를 안 했다"

사진 출처, 뉴스1
주한 미국 대사관 외교관 차량이 택시와 추돌 후 어떠한 조치 없이 현장을 벗어나는 이른바 '뺑소니' 사고를 냈다. 이후 출동한 경찰의 검문을 무시한 채 '미국 영토'인 용산 미군기지 영내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은 사고 택시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언론에 공개되었다.
영상 속에서 사고를 낸 미국 외교관은 "사생활 침해"를 주장했고, 미국 대사관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침묵"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들이 어떻게 사고 후 아무런 조치 없이 운행을 할 수 있었는지, 경찰의 검문에 불응해도 문제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미국에서 뺑소니의 의미는 한국과 다른 것인지, 당시 '사생활 침해'는 정말 발생했는지 등을 알아보았다.
"차를 치고 갔지만 '뺑소니'는 안 했다"
지난 10일 오후 5시 35분쯤 서울 남산 3호 터널 인근.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차선 변경을 시도하려던 SUV 차량. 뒤에서 직진하던 택시가 길게 경적을 울렸지만 결국 두 차량은 부딪혔다. 미국 대사관 소속 번호판을 단 SUV 차량은 사고 직후 그대로 현장을 떠났다.
뒤따르던 택시 기사는 정차구간에서 내려 SUV 차량 운전자에게 멈출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 대사관 관계자 4명을 태운 차량은 이를 무시하고 다시 출발했다.
차량이 약 1km를 달려 도착한 곳은 용산 미군기지 앞, 사실상 미국 영토다.
택시기사의 신고로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미국 외교관들은 한국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을 '특권'이 있었다. 그렇게 사고 차량은 미군기지 영내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은 택시 블랙박스와 도로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뺑소니'와 'Hit-and-Run'의 차이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뺑소니 혐의가 적용된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사고가 나면 차에서 내려 다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연락처를 교환해야 한다. 이후 상대방의 허락을 받은 뒤 현장을 떠나야 한다"라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사고 책임에 대해서는 "택시가 양보하지 않은 것에도 잘못이 있다"라면서도 "직진하는 차량에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이번 사고의 잘못은 미 대사관 차량 잘못이 70%, 택시기사의 잘못이 30%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른 법률이 적용되지만 '뺑소니'에 대해서는 비슷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서는 "차량이 추돌하면 즉시 사고 현장에 멈춰 조처 해야 하며 그렇지않으면 '뺑소니 (Leaving after colliding)' (§ 50-2201.05c)"라고 정의한다.

사진 출처, 미국 워싱턴DC 시의회 사이트 캡처
'뺑소니'는 몰라도 '사생활 침해'는 안다
공개된 영상 속에서 미국 외교관은 택시기사에 대해 "나를 촬영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다"라고 거듭 주장한다. 경찰의 신원 확인과 음주측정 요구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용산경찰서 교통관리계 담당 조사관은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의 질문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결국, 경찰은 사고를 낸 차량 운전자가 미국 대사관 소속 2등 서기관이라는 것과 나머지 차에 탄 3명 또한 미 대사관 관계자라는 것을 외교부와 미군기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태우 법률사무소 티앤에스 변호사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사생활 침해 여부가 문제 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 변호사는 택시 기사의 영상 촬영은 "뺑소니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의 요청을 거듭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해 차량 운전자를 특정하기 위한 채증행위"라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이어 "사생활 침해는 보호받을 가치가 있을 때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범죄 현장에서 사생활 보호를 논하는 것은 모든 CCTV를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도 "사생활 침해는 사건과 별개의 문제"라면서 "본인이 사고를 일으키고 그냥 현장을 떠난 사실을 희석할 수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면책 특권
경찰은 미군기지 영내로 진입하는 미 대사관 차량을 막을 수 없었다. 전 세계 192개국이 가입한 '외교 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따른 한국에 파견된 외교사절과 그 가족은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는 '면책 특권' 때문이다.
경찰은 다음날인 지난 11일 외교부를 통해 주한 미국대사관과 외교부에 경찰 조사 협조와 면책 특권 행사 여부 질의 등의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용산경찰서 교통관리계 담당 조사관은 "아직 미국 대사관 측에서 답변 온 것은 없다"라면서 "가해 차량 운전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출석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언제까지 출석해야 한다는 기한을 정할 수는 없다"라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미국 대사관 측에서 답변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미국 대사관이 면책특권을 행사하면, 한국에 공소권이 없기 때문에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 미 대사관은 한국 외교부를 통해 조사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택시기사 43살 박 모 씨는 사고 당일 용산경찰서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사진 출처, 뉴스1
'뺑소니'도 외교 활동일까?
살인죄도 피할 수 있는 면책 특권이지만 본국에서 포기하면 특권은 사라진다.
지난해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부부는 '짝퉁' 가방을 판매하다 적발됐지만, 당시 미국이 면책 특권을 포기하면서 한국 경찰에 체포됐다.
이 같은 경우는 예외적으로 지난 5년간 주한 외국 공관원이 낸 사건 사고는 70건에 달하고, 대부분이 면책 특권으로 처벌을 피하며 이들은 '법 없이도 사는 삶'을 누렸다. 용산경찰서 교통관리계 조사관은 "많은 주한 외국 공관원들이 신호 위반 등 교통법을 위반해 과태료를 내야 하지만 이들의 납부율은 매우 낮다"라고 밝혔다.
김태우 변호사는 "면책 특권의 취지는 원활한 외교활동을 위해 고의 없는, 과실에 의한 피치 못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자는 것"이라면서 "상대국가의 법체계를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 사건 같은 경우에 면책 특권이 적용된다면 면책 특권의 존재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언론의 관련 보도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 "해당 수사가 종결되기 전까지는 추가적인 해명을 자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BBC 코리아는 미 대사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언론 보도 내용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인지, 사고를 낸 외교관이 당시 사고 현장에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경찰의 협조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면책 특권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사생활 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